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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창천항로 - 순욱과 조조 이야기 : 왈츠 일대기

1. 유비에겐 제갈량이 있다면, 조조에게는 순욱이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많은 군웅들에게는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그들을 상징하는 책사가 항상 따라다닌다. 손권에게는 주유를 시작으로 노숙, 여몽 등이 있었다면 유비에게는 그 유명한 제갈량. 그리고 군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조에게는 휘하 책사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제갈량과 비견될 만한 대칭점을 찾자면 순욱이 가장 가깝지 않을까싶다. 

조조의 책사 중에 필두를 뽑으라 하면 순욱이 아닐까 - 출처 : 조조전

순욱은 조조의 성장에 있어 대부분의 기틀을 담당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접적인 책사의 역할은 물론이오 곽가, 순유 등 조조군을 대표하는 인재들의 경우도 대부분 순욱의 추천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천자 옹립이라는 조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큰 틀의 주체도 순욱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2. 하지만 다른 엔딩

다만 순욱의 말년은 좋지 않았다. 정사와 연의에서 병사 혹은 자결로 묘사되는데, 한과 위 라는 특수한 국가 정립 상황 속에서 조조의 위공 즉위를 둘러싼 대립 끝에 비극을 맞이하였다. 끝까지 충의를 지키고 변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제갈량과 달리, 순욱은 조조와 극한 대립 속에서 결국 버려지며 최후를 맞이한다.

토사구팽과 더불어 오늘날 다양한 밈으로 쓰이는 빈 찬합 - 출처 : 대군사 사마의

 

개국 공신과 가장 가까웠던 측근마저 자신의 대업에 하나의 장기말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이어진 비극적인 결말은 오늘날 조조가 악(惡)으로 묘사되는 연유 중의 한 가지로 뽑힌다. 실제로 순욱 사후, 조조의 행보에는 순욱의 부재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이 여기저기 나타나게 된다. 특히 한나라 중신 출신으로, 큰 틀을 담당하는 순욱에 대한 조조의 태도는 나중에 이어질 사마가(家)에 의한 왕위 찬탈의 결과로 어느정도 연결 된다.

 


 

3. 창천항로 - 조조와 순욱의 왈츠

조조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믹스, 창천항로에서의 순욱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창천항로에서는 조조의 모든 악행에 대해 사뭇 잘 꾸며진 이유와 그럴싸한 상황들로 당위성을 부여하고, 영웅화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순욱과 조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의 잘 꾸며진 서사시 같이 묘사된다. 일반적으로, 창천항로에서 조조와 휘하 신하들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조조가 굉장히 신격화 되어있고 부하들은 각자가 가진 개성에 기반하되 철저히 상하 관계로 묘사되지만, 순욱은 더욱 친밀하고 존중의 의미까지 내포될 정도로 색다르게 묘사된다.

 

일반적인 군신의 관계(좌) / 순욱과의 관계(우)

 

 

그러나 유교를 둘러싼 갈등을 시작으로 점점 실제 삼국지처럼 조조의 패권에 대한 야망과 순욱의 한나라에 대한 충절의 신념이 충돌하는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을 한다. 물론 창천항로에서의 조조는 이러한 사건을 야망이 아닌 대업을 이루기 위한 사소한 단계로 치부하지만 그러한 사소한 일에 한나라 왕조의 몰락이 걸려 있기에 순욱은 이를 알고 반대하는 것.

 

결정적으로 동소의 위공 발의(위나라 설립 및 위나라의 왕으로 조조를 추대. 결론적으로 한나라의 몰락을 암시한다.)를 기점으로 갈등의 크기는 최고조를 향해 나아가며, 그 유명한 '빈 찬합'의 사건이 벌어진다.

 

 

원작과 다르게 빈 찬합대신 백지의 종이가 배송이 되었고, 이는 조조 입장에서는 과거 순욱과 눈싸움을 하였던 것을 회상하며 다시 눈싸움을 약속한 겨울이 오려면 멀었다. 버텨줘라 라는 의미로 보낸것이고, 순욱이를 조조와 자신의 관계 + 한나라 왕조를 백지화 한다라는 오해와 과해석 속에서 자살한다. (작중에서 심장에 문제가 생긴 순욱을 위해 화타의 제자들이 약을 만들었고, 해당 약을 먹으면 수면제의 효과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순욱은 이런 약을 다량으로 복용함으로서 자살을 한 셈)

 


 

4. 왈츠의 막간은 정말로 자살인가?

하지만 정말로 순욱이 눈덩이를 보낸 조조의 뜻을 오해하고 자살을 하였을까? 순욱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한왕조의 뜻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조조의 위왕 즉위를 반대하고, 다른 대신들하고도 대립하였지만 정작 조조도 자신만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닌, 모든 대업을 위한 과정(창천항로에서의 조조는 늘 최선의 선택만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이며 위공이나 위왕의 관직따위 소소한 것임을.

 

순욱의 눈치는 작품에서도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다양한 장면 회상을 통해 한 왕조는 이미 기울어져 있으며, 민중과 나라를 위해서는 조조를 기반으로한 신왕조 수립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러나 한 왕조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위왕에 즉위한다면 후세에 조조는 한왕조를 찬탈한 악인으로(역사대로) 묘사되기에 순욱은 이 모든 것들을 염려하여 위왕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순욱은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한 왕조에 대한 신념도, 조조 대한 신념도. 깨진 그릇을 바라보며 차라리 자신도 두 동강이 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 

 

 

 

결론적으로, 순욱은 모든 것을 잊기로 선택한 것이다. 다양한 상황들과 그에 수반한 결과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따르면 한나라와 위나라 중 하나만 선택을 할 수 없기에 차라리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꿈에서 왈츠의 마지막 단(눈과 음표가 섞여 휘날리고 있다.)에서 찬합 안에 자신을 담으면서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모든 선택을 담아 낸 것이 아닐까.

 

 


 

 

5. 라스트 왈츠. 그 후

 

순욱 사후, 조조는 순욱이 없는 천하로 묘사한다. 작중에서 아무리 부하를 아끼는 조조라지만 마지막까지도 사뭇 다르며, 자의로 죽음에 몰아넣었던 삼국지 원작과는 반대의 행보를 보인다. 또한 이후에 한빈이라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나서는데 한빈에게서 자신이 아는 누군과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으며 한빈을 존중한다. 그리고 이 때 한빈을 내려보는 조조의 시선에서는 순욱의 얼굴이 보인다. 자신과 다른 행보를 하였지만, 창천항로 작중 내에서 유일하다시피 같은 간웅으로서 순욱을 인정하였다. 

 

순욱의 얼굴이 투영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내용은 허구다. 연의와 정사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하지만, 창천항로에서만 작가 특유의 감성을 담아 재구성하여 만든 드라마란 것. 킹곤타는 창천항로에서 조조와 순욱의 관계를 왈츠로 묘사하여 표현하였으며, 파극으로 끝맺음 했던 실제의 관계를 비록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음색으로 표현하였다. 

 

사실 순욱과 조조의 관계와 결말의 인과를 따지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많다. (예시 : 순욱은 정말 한나라에 대한 애정이 있는가) 더더욱 그러기에 실제 사건과 기록된 일들을 나름 그럴싸하게 재해석한 이 부분은 삼국지를 읽은 독자들이 짐작 할만한 또다른 결말이 아니었을까.